영상에서 이승진 변호사가 말한 내용을 자막을 바탕으로 읽기 쉽게 정리했습니다. 인사·상담 안내 등은 생략했고, 금액·기준 등은 영상 게시일(2025-08-07) 기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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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 빚은 갚아야 하지만 최우선은 아니다
빚은 꼭 갚아야겠죠. 빚은 꼭 갚아야 되지만, 무엇보다 우선해서 갚아야만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질문: 무슨 말씀이신가요?
0:46 빚 탕감 운동과 주빌리(희년)
그에 대해서 재미있는 이론을 전개한 인류학자가 있는데요. 예전에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라는 운동이 있었어요.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왜 대형 은행들은 채무를 탕감해 주고 일반 금융소비자들의 작은 빚은 탕감해 주지 않느냐, 왜 우리의 모기지론은 탕감해 주지 않고 대형 은행들에는 정부가 지원을 해 주느냐, 이런 주장을 하면서 빚 탕감 운동이 벌어진 적이 있어요.
성남시가 했던 주빌리은행도 이 분위기를 탄 건데요. 그때 성남시에서 시 예산과 금융기관의 도움으로 오래된 장기 연체 채무를 사들여서 채무를 탕감해 주는 것을 시행했었죠.
그럼 주빌리가 뭐냐. 이걸 롤링 주빌리 운동이라고도 하는데, 주빌리가 성경에 나오는 희년이에요. 희년은 50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데, 50년에 한 번씩 모든 빚을 탕감해 주자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질문: 그러게요. 채권자들이 안 좋아하지 않을까요?
그렇죠. 채권자들이 안 좋아하겠죠. 그런데 그럴 필요성이 있으니까 성경에 그런 내용이 들어가 있겠죠.
1:53 솔론의 채무 탕감과 『부채, 첫 5,000년』
또 이런 것도 있죠. 그리스 아테네에서 솔론이라는 정치가가 당시 빚진 여러 시민들의 채무를 다 탕감해 주는 일이 있었어요. 빚이 꼭 갚아야 되는 것이라면 그렇게 되는 것에 사람들이 동조하지도 않고 다 반대했을 텐데, 역사적으로 그렇게 이루어진 이유가 있을 거란 말이에요.
이 의문에서 시작된 것이 제가 오늘 소개하고 싶은 『부채, 첫 5,000년』이라는 책의 내용인데요. 이 책은 인류학자가 쓴 경제 역사라고 해서, 부채라는 것에 대해 경제학자가 아니라 인류학자의 관점으로 접근하는 내용이에요.
2:33 물물교환 이전에 신용이 있었다
가장 먼저 문제 삼는 것은, 화폐는 물물교환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 잘못됐다는 거예요. 실제로 인류학자가 많은 원시 사회를 조사해 보니, 물물교환 이후에 화폐가 출현한 것이 아니라 처음의 사회는 신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했어요.
무슨 말이냐면, 저한테 닭이 있고 제 친구한테 쌀이 있는데 제가 쌀이 필요해요. 그럼 제가 가서 닭 한 마리와 쌀 1kg을 바꾸자고 합의해서 교환하는 게 아니라, 나 쌀이 필요한데 좀 줄 수 있어, 하면 그 사람이 쌀을 줘요. 그리고 신용이 쌓이는 거죠. 그다음에 그 사람이 닭이 먹고 싶을 때 저한테 와서 너 닭 먹을 때 나도 불러 줘, 하면 또 닭도 나눠 줘요. 이런 식으로 출발했고, 물물교환 단계는 사실상 없었고, 나중에 가서 화폐가 출현했다는 관점을 제기하고 있어요.
실제로 인류학적·고고학적 조사를 아무리 해 봐도 물물교환의 흔적보다는 신용을 토대로 거래가 일어난 것이 더 많이 기록돼 있다고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가족이나 친구가 부탁하면 일단 해 주잖아요. 그리고 이 사람이 나한테 뭘 해 줬으니까 나도 나중에 이 사람한테 부탁해야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잖아요.
화폐는 이 사람의 말로는 나중에 군인들을 고용할 필요가 생기면서 나왔어요. 용병들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신용으로 고용할 수가 없고, 신용의 징표로 뭔가 물질적인 것을 줘야 돼요. 그것이 바로 동전이었고, 이를 통해 동전이 퍼져 나가게 됐다고 얘기합니다.
4:20 빚이 계약보다 먼저가 아닌 이유
질문: 그런데 그거랑 빚을 안 갚아도 되는 거랑 무슨 상관이죠?
빚을 무조건 갚아야 된다는 것은 빚이라는 약속, 계약이 가장 최우선한다는 개념이에요. 그런데 물물교환보다 신용이 먼저 있었다는 것은, 서로 물건의 가치만 비교하는 계약보다도 이 사람과 나의 관계, 내가 베풀면 이 사람이 나한테 무언가 베풀 수 있는지에 대한 사람에 대한 믿음, 그리고 이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이런 여러 면이 함께 고찰돼서 빚이라는 제도가 출현했다는 거죠.
그러면 빚은 계약은 무조건 지켜야 된다는 개념처럼 최우선적으로 지켜야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회적인 필요성이 있다면 빚도 탕감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성경에도 희년이라고 해서 빚을 탕감해 주는 제도가 있었고, 각 나라에서도 새로운 왕이 취임하거나 하면 필요에 의해 빚을 탕감해 주고, 전쟁 이후에는 세금도 탕감해 주는 필요성이 있었고, 이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말이죠.
5:23 모럴 해저드의 원래 뜻
그러면 도덕적 해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얘기할 거냐,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데 도덕적 해이를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어요. 빚을 안 갚는 것을 용인한다는 관점에서 도덕적 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거든요.
그런데 도덕적 해이는 그렇게 윤리적인 관점에서 나온 단어가 아니에요. 모럴 해저드가 원래 단어인데, 이 표현이 처음 쓰인 것은 영국의 보험 계약에서였다고 해요. 보험 계약과 관련해서 피지컬 해저드와 모럴 해저드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피지컬 해저드는 객관적인 위험이에요. 불이 났다, 홍수가 났다, 이런 것이죠.
모럴 해저드는 그때는 도덕적 해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주관적 위험이라는 개념이었어요. 보험에 가입한 사람이 나쁜 마음을 먹고 내 물건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서 불이 나게 했다, 이게 모럴 해저드거든요. 빚을 안 갚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거예요.
빚을 안 갚는 것이 도덕적 문제이기 때문에 도덕적 해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럴 해저드라는 말의 용법이 지금은 조금 바뀌었기 때문에 우리가 오해하는 것일 뿐, 원래 뜻은 그게 아니라는 걸 명확히 하고요.
6:34 계약 자유의 제한과 개인회생 제도
그러면 왜 빚을 갚아야 된다는 명제가 도덕 명제가 아닌 거냐. 빚을 갚아야 된다는 명제는 계약의 명제예요. 서로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계약의 명제고, 서로의 합의하에 이루어진 것이고요.
모든 계약에는 상위 규범이 있습니다. 계약법 위에는 우리나라의 헌법이 있고, 헌법은 사적 자치의 원칙에서 계약 자유의 원칙을 보장하는데, 이 계약 자유의 원칙은 항상 무조건 지켜야 되는 것이 아니라 제한을 받을 수가 있어요. 우리가 흔히 아는 고금리 대부업, 연 20%가 지금 법정 최고금리인데, 연 100%를 내게 하는 계약은 법으로 금지해서 무효로 만듭니다. 사회적 필요성이 있으면 계약의 자유를 제한할 필요도 있다는 말이에요.
개인회생 제도, 그리고 고대 주빌리 제도 같은 것은 더 큰 공공의 목적을 위해 개인의 계약의 자유, 계약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으로 이해해야지, 이것이 도덕적인 약속을 안 지키는 것을 방치하는 것이라고 오해한다면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사적으로 계약을 하더라도 인권에 위배되면 계약이 무효인 것처럼요.
질문: 그렇죠.
채무도 그 계약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면 제한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을 정부와 국회, 학자들이 고민해서 제도적으로 만든 것이 개인회생 제도이고요. 일정한 요건 아래에서는 개인회생과 파산을 통해 채무자를 구제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사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사람들이 계약 자유를 더 지킬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한 거죠.